“ 대표님은 왜 한국마더십협회를 시작하신 거예요?”
23년 6월 10일 남다른 질문법과 프레임을 바꾸는 코칭법을 제대로 배우고 싶어하는 수강생들을 대상으로 한 4주간의 전문가 과정을 마치고,
쫑파티겸 수제 햄버거집에서 한 수강생이 햄버거를 막 입에 넣으려는 내게 질문했다.
“맞아요, 한마협 탄생 설화요~ 대표님이 시작하게 된 개인적인 이야기도 직접 듣고 싶어요~”
“아!!ㅎㅎ 그러고 보니 한마협 법인등록하고 시작한지 딱 2년하고 2개월째인 날이네요.”
다들 이미 잘 알고 들어와서 전문가과정까지 하고 있을꺼라고 생각했지만,
직접적으로 만나서 육성으로 들은 적은 없기에
내 입을 통해 다시 한번 듣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나는 왜 이 사업을 하고 있고, 왜 나여야만 하는지’ 다시 돌아보게 만들었다.
잠시 숨을 고르고,
“저도 살고, 아이도 살리려다 보니 배우고 실천하게 되더라구요.
그리고 그 경험을 본격적으로 나누게 된 게 한마협 시작이었어요.”
-‘너도 살고, 나도 좀 살자’ 살아남고 살리기 위한 고군분투-
아이들이 부모에게 뼈저리게 아픈 신호를 보내서 ‘함께 성장하자’는 신호를 보낼 때가 있어요.
지금 돌아보면 그때가 그랬던 거 같습니다.
결혼 전, 국내가장 큰 항공사에서 승무원을 하며 사내강사 면접관 vip전담 승무원으로 나름 그 안에서는 최선을 다하는 꽤 괜찮은 승무원으로 힘들지만, 즐기면서 비행을 했었습니다.
주변에서 결혼한 선배들이 출산을 하고 복직을 해서 비행가서도 아이에 대한 걱정을 하고,
떨어지기 싫어하는 아이를 놓고 비행하는 것에 죄책감이 들어 일을 그만두거나 지상직으로 전근 신청하는 선배들을 보면서..
(물론, 육아보다는 비행이 더 쉬워~ 하는 선배들이 더 많다는 걸 육아하면서 돌이켜 보니 왜 그런지 보이더라는..)
‘나는 출산하면 아이에게 집중해야겠다.’하는 마음을 자연스럽게 먹게 되더라구요.
결혼 후 아이가 예상대로 바로 오지 않고, 3년을 기다린 후에야 찾아왔습니다.
이미 한번 의 자연유산을 경험하고 저에게 온 아이라
남편과 저에게는 더없이 소중했고, 임신과 출산의 과정동안 아마
‘좋은 엄마 되기’에 대한 기대와 부담은 더 강해졌을거라 생각합니다.
‘퍼스트클래스 VIP승객처럼 아이를 다룬다’
조금은 까다롭거나 VVIP 승객이 퍼스트클래스에 탑승하면,
해당 클래스 사무장이었던 나는 장거리 비행에도 휴식시간 없이 거의 대기상태였습니다.
(장거리 비행에서는 식사서비스 후 승무원도 교대로 벙커나 지정석에서 휴게시간을 가진다.)
언제 나의 도움이 필요할지 모르는 승객의 콜버튼에 바로 응대하기 위해서였죠.
아이가 태어나서 산후조리원에서 집으로 와서 처음으로 나 혼자 아이를 감당해야했을 때
그 두려움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너무 귀하고 어찌 다루어야할지 몰라 안절부절하며
아이가 조금이라도 뒤척이거나 울면 하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아이에게 달려갔습니다.
‘최고의 육아 서비스로 모실께요~’ 하는 마음의 자세가 충만했던 때였습니다.
그리고 그게 최고의 엄마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아이가 제 모든 생활의 우선이 되고, 제 몸이 힘들거나, 마음이 힘든 것을 돌아볼 겨를도 없었습니다.
일하던 열정을 아이에게 그대로 쏟아부었습니다.
육아의 매뉴얼이라 불리는 육아서들을 틈틈이 읽고,
맘 카페에 들어가 아이 발달상 지금 뭐 놓치고 있는 건 없는지..
어떤 육아템이 도움이 되는 지 등등..
매순간 최선을 다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열심이었습니다.
둘째를 가지고, 휴직을 연장했다가 복직을 할 마음이었지만, 어디 인생이 뜻대로 되나요?
특히 자녀계획은 더욱더 그렇더라구요.
둘째 임신이 뜻대로 되지 않고, 더 이상 병가 연장을 할 수 없어 과감하게 사직서를 내고
회사주차장에서 꺼이꺼이 울었던 기억이납니다.
힘들었지만, 저의 20~30대의 열정을 쏟은 곳이기에 아쉬운 마음이 너무 컸습니다.
(사직서 내고 딱 한달 뒤 둘째 임신 소식이.. 둘째는 엄마가 일하러 가는 게 싫은 아이인게 분명하네요)
그리고, 사직한 이후 더욱 ‘프로 엄마’가 되기 위해 애썼던 것 같습니다.
경력이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엄마’ 역할로 전환되었다! 하고 스스로 위로하고 격려하였습니다.
먹거리부터 아이의 건강, 신체발달을 위한 놀이와 활동, 자연주의 육아를 위한 공동육아생활 등..
지금 하라고 하면 손사래 칠 그때의 열정은 충분히 ‘프로 엄마’의 연기를 충실히 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그러면서 불안하고 조급한 마음을 잘하고 있다고 달래고 있었습니다.
-뼈 아픈 신호-
내 생각과 말과 행동이 독이었구나!’
말로 소통하는게 아니라, 말의 칼로 상처내던 엄마였습니다.
워딩wording이 아니라, 소딩(swording)이 하고 있었던 엄마
그렇게 첫째 아이가 초등학교를 입학하고,
들로 산으로 놀러 다니던 아이가 학교라는 인테리어부터 딱딱한 교실에 처음 들어갈 때
그 긴장하던 모습이 아직도 선합니다.
며칠 잘 다니나 싶더니,
아이는 발이 땅에 붙은 것처럼 등교를 거부했고,
혼내기도 하고, 억지로 끌고 가기도 하고, 협박도 하고 하면서
하루하루 학교 보내는 게 두려워지는 시기가 있었습니다.
아이의 이유를 들여다 볼 생각을 하기 보다 ‘어떻게 하면 학교 가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하루를 시작했었습니다.
아이는 한동안 자포자기한 듯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학교를 갔고,
저는 하루에도 여러번 대안학교나 홈스쿨링을 생각하며 불안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내던 때였습니다.
신호가 오다!!!
하루는 주말저녁 외식으로 먹은 쌀국수 면이 목에 걸려서 아이는 구역질을 하고
저는 다급하게 손으로 국수를 뽑아내는 일이 생겼어요.
아이는 숨이 막히니 굉장히 놀란 듯 했지만, 이내 마저 먹었고, 그 전에도 그런 일이 몇번 있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그렇게 집에 왔습니다.
그러고는 며칠 후 부터 아이가 갑자기 음식을 전혀 삼키지 못하는 거였습니다.
다시 신생아로 돌아간 것처럼 고형식을 전혀 삼키지 못했고,
국물도 건더기가 조금만 있어도 삼키지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목에 면이 걸러셔 숨이 막혔던 경험 때문에 그런가보다 한두끼 굷어서 배고프고 시간지나면 먹겠지’ 하면서 국물 위주로만 먹였는데,
이게 하루 이틀이 지나도 좋아지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양한방으로 방법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습니다.
병원에서는 다양한 의사 소견이 있었지만,
공통적인 소견은 ‘아이의 스트레스’라는 것이었습니다.
아이의 스트레스
‘뭐? 스트레스? 뭐가 이렇게 이 작은 아이의 목을 조일 만큼의 스트레스였을까?‘
’내가 그렇게 신경을 많이 썼는데도 스트레스가 많았다고? 몸이 아플만큼?‘
하는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심리 상담부터 양방 한방으로 집중적인 치료를 해도 아이는 여전히 삼키지 못하고,
눈앞에 맛있는게 있어도 먹지 못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수액으로 겨우 살아내고 있는 아이를 보고 있으려니 정말..
기가 막히고, 피눈물이 나고 가슴이 타 들어가는 심정이 딱 제 심정이었어요.
아이가 먹지 못해 죽을 거 같다는 공포감이 더 커졌고,
저는 정신을 차려야만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질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린아이가 무슨 스트레스가 많아 아이는 삼키기조차 힘들게 되었을까?
내가 뭘 잘못 한 거지?
나도 모르게 아이 목을 조르고 있었던 게 뭘까?
나는 최선을 다 한다고 했는데…’
그 모든 게 저의 탓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자책하고, 자책하기를 반복했습니다.
‘학교 적응하느라 힘들었을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힘들었을까?’
아이의 스트레스 상황을 되짚어보기 위해 아이가 힘들어하던 상황을 쭉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그럴 때 함께 하던 저의 표정과 말투 다그치던 모습들이 자연스럽게 같이 떠올랐습니다.
유난히 엄마의 표정과 목소리톤만 바뀌어도
‘엄마 화났어요?’‘엄마 기분 안 좋아요?’하며 저의 상태를 살피던 아이였습니다.
그런 아이가 학교에 들어간다고 긴장한 것은 아이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동안 남들 학원 다니고 영유 다니는 동안 못했던 거 이제부터는 제대로 해야지 하며, 굳은 표정으로 오히려 아이보다 더 심기일전하는 모습을 보였던 제 모습이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숙제를 하며 못하는 아이를 눈이 찢어져라 째려보았고,
조금만 느리거나 행동이 굼뜨면 한숨을 쉬며 아이에게 ‘너 정말 실망스러워’라는
다양한 부정적인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등교거부를 했을 때는 소리 지르며 아이를 다그치고,
아이로 인해 부끄러워진 내 입장을 아이에게 퍼부었습니다.
그 모든 순간 아이는 세상을 다 잃어버린 눈을 하고 있었다는 걸 그제야 알아차렸습니다.
아이의 눈에 비친 엄마는
늘 받아주며, 같은 목소리로 반응하던 엄마는 이제 사라지고,
눈에 불을 켜고 아이보다 더 ‘학교생활 열심히 잘해야지’하고
의욕과 긴장이 가득한 엄마의 모습이었을 겁니다.
하루하루 아이의 위태로움을 지켜보며 좌절과 자책을 무한 반복하던 때였습니다.
‘이대로는 아이도 이대로 가다가는 말라 죽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번 만 더 아이와 함께 성장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세요.”
“그리고 이 위기를 극복해 낼 지혜를 조금만 빌려주시면, 아이를 살리는 지혜를 더 연구하고 알리는데 남은 생을 다 바칠께요!! 제발”
뭘 걸고라도 빌었어야 했습니다.
혹시라도 기도를 안들어주실까봐요..
그리고 그때 이후 약속을 지키기 위해 쭈욱 제가 엄마 리더십이라는 이름으로 이 일을 해오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자식을 걸고 한 약속이기에 지키고 싶었습니다.)
정산차리고 중심잡기
그리고 그때 제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아이의 증상을 당장 바꾸려 하기보다
제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중심잡아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다행히 10년 이상을 승무원으로, 안전훈련교관으로 비행하면서
저도 모르게 위기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이 체화되어있었고,
비상상황에서는 우선 엄마가 먼저 충격에 대비하고, 산소마스크를 써야
아이를 구할 수 있는 것처럼, 제가 먼저 정신을 차려야했습니다.
다르게 전환 해보자!
그때부터 그 시련과 불안을 견디기 위해 ‘다르게 전환해보기’로 결심했습니다.
‘순간의 좌절은
우리에게 변장하고 다가온 축복!’ 이라는 말을 믿고,
힘들지만, ‘배움의 자세로 전환해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아직도 저는 그때의 그 선택을 한 것에 감사합니다.
한마협의 가장 중심이 되는 철학 중에 하나가 바로
‘아이의 문제에만 집중할 것이 아이라,
아이가 배우고 성장하기 위해 보내는 신호를 알아차리자!’
바로, 시련과 좌절을 배움의 기회로 보고 배우는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어느 때 보다 회복을 돕는 힐러의 입장으로,
위기와 고통을 극복하는 치유자의 자세로 공부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장, 아이도 살리고, 나도 살아남기 위해서요..
이어지는 이야기는 다음 포스팅에서 계속됩니다.